설 교 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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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상대적 평안이 아닌 절대적인 평안입니다. 이 절대적 평안을 힘입고 구약의 성도들은 능히 이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대표적으로 기드온과 다윗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신약 속에 흐르는 평안의 현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1. 로마와 빌라도(눅23:13~25) “지킬 수 없는 샬롬”
- 로마는 세계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초강대국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세계통치의 슬로건입니다. 팔레스타인지역 최고 권력자는 빌라도입니다. 로마가 만든 최고의 엘리트입니다. 그런 빌라도가 법정에서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아무런 죄를 찾지 못했음에도 법정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선고를 합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성공들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로마가 내세운 정의와 평화의 한계입니다.
- 눅23:13~25절에서, 빌라도가 이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소신을 펼치지 못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1) 빌라도의 주장입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은 죄가 없다”를 무려 네 차례나 반복합니다.(4,14,15,20,22) 반복의 원인은 두려움입니다. 2)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여야 한다”는 이성을 잃은 군중들의 주장에 빌라도는 꼬리를 내리고 맙니다.(4~7,22~25) 지금까지 이룬 성공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평안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 곳곳에 일어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2. 유대교와 가롯유다(요13:2,10~11,21~30)“인내하지 못하고 타협”
- 유대교는 최고의 종교입니다. 어떤 종교와도 비교가 안 되는 산 역사를 가진 종교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등의 선조들이 남겨준 “샬롬의 유산”죽은 종교의 틀에 가두어 버리고 맙니다. 그 결과 생명도, 샬롬의 유산도 잃어버리고 맙니다. 이방나라에 짓밟히고 노예로 전락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절대 평안”보다 “세상이 주는 상대적인 평안”을 주구했기 때문입니다.
(마21:12,13 성전청소)
- 가롯유다가 영광스런 사도의 자리를 박차고 나옵니다.
예수님 주시는 평안보다 돈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 요12:4~6,13:2,10~11,21~30,18:3절에는 가룻유다가 돈 때문에 마귀에게 휘둘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가는 장면, 예수님을 체포하는데 앞장선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예수 믿고 따르면서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마음의 평안, 말씀과 성령께 순종할 때 오는 생활 속에서의 평안을 끝까지 추구해야 합니다. 가롯유다는 돈 중심의 가치관을 예수님 따르면서도 포기하지 못합니다.(12:4~6) 마귀가 그런 유다마음을 바로 휘두르기 시작 합니다.(13:2) 이런 유다의 모습 내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내 모습 살펴야 할 때입니다.
3. 제자들과 베드로(고전1:26~31) “가슴에 가득한 샬롬으로”
- 고전1:26절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세상 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부르시고 제자로 세우십니다.
- 마16:22~23/20:20~28/26장 등에서 제자들이 크고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합니다. 성격 때문에, 성공과 출세하는 것 때문에,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뿔뿔이 흩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저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 요20:19~23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그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가운데 서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축복하십니다.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불어 넣어주시면 “성령을 받으라”하십니다. 그리고 죄를 결박하고 푸는 권한까지 주십니다. 이 평강을 가진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고 사도행적의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